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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엽편] 프로스트힐

alicekim245 2017. 6. 4. 20:16

꽤 멀지 않은 곳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는데 막상 여기까지 오는 길은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고 지루한 여정을 필요로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바라보는 푸른 잎새의 반짝임이, 지금은 그저 시끄럽기만 하다.
사샤. 네가 여기까지 오는 길은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길었겠지? 원치 않는 여행의 마지막이 파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 끌려왔어야만 했던, 신부의 새하얀 복색을 하고 이 장원에 발을 딛으면서 당신은 웃고 있었을까, 혹은 울고 있었을까.
너를 그렇게 떠나보내어선 안되었는데.

새하얀 비단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자꾸만 난다. 긴장한 탓에 드레스를 손으로 꽉 쥐고 있던 탓이었다.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잔소리를 할 법 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문이 자물쇠로 잠긴 마차를 탄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복색은 새신부의 그것인데 어째서 이런 굴욕적인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지 설명하려면 꽤 길다. 하지만 어쩌면 단순하다. 나는 팔려가는 중이었다.

같이 도망가자고, 나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꿈 속에서의 거절이었다. 그 사람은 단 한번도 내가 필요로 할 때 내게 온 적이 없었다. 내가 보았던 그 따뜻한 순간들이 모두 나의 환상이었을까, 혹은 꿈으로만 기억해 달라는 당신의 마법이었을까? 이제는 모르겠다.

마차의 문이 덜컥, 열리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가 내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는 일을 도와주었다. 검은색.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 상복의 색깔이었다. 내 죽음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망자의 마지막 복색이 붉은빛이면 어떨까?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 웃으며 내 무덤에는 붉은 장미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었다.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나면 당신은 내게 그 꽃을 가져다 줄까. 사랑을 속삭이고 덧없는 영원을 속삭이던 순간 정표로 건네주었던 그 장미를.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샹들리에의 불은 빠짐없이 켜져 있어 휘황찬란하도록 빛났지만 신부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그걸 알기라도 하듯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백색 면사포를 휘저었다. 스스로 그 면사포를 벗어던지고 수많은 계단을 돕는 이 하나 없이 올라갔다. 난간에 붉은 장미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나의 조화(弔花)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육중해 보이는 문은 손을 대자 스윽-하고 열렸다. 그녀가 스스로 열지 못했을 문이었다. 새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쉬웠다면 진즉 구하러 왔을 것을. 늦은 뒤에야, 떠나신 뒤에야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아신다면 나를 향해 웃어보이실텐가요.

색이 노랗게 바란 면사포가 붉은 카펫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 끝이 문득 검붉은 피로 적셔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손에 쥐어들자 그 가벼운 천은 파삭 소리를 내며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마치 그녀가 내게서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처럼. 혼자 올라갔을 저 계단이 더욱 가슴아팠다. 난간에 여린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문이 열려있는 방은 딱 한 곳 뿐이었다. 마치 유령에 이끌리는 것처럼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깨끗한 리넨 향과 장미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벽에 발린 푸른 비단과, 새하얀 침대 위에 가로질러 놓인 붉은 비단이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푸른 장미 한 송이는 내가 비현실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곳에서 스스로 신부의 드레스를 벗었다. 원하던 이를 위해 입지 못했던 옷이니 사정없이 구겨 불타는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철저히, 온전히 혼자였다.

유리창이 하나도 깨지지 않은데다, 이상할 정도로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다. 우습게도 나는 그녀의 작은 발이 향하는 방향마저 볼 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때로는 나를 앞서기도 했던 그녀가 걸어갔던 길을. 쭉 따라가니 방문 하나와 마주했다. 문 손잡이에 붉은 피가 남아있었다. 손을 갖다 대자 붉은 피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점점 이 저택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문을 열었다. 아직 밝은 한낮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잠시 내 시야를 방해했다. 샹들리에에 걸려있는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보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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