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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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B3

alicekim245 2025. 10. 31. 16:40

거문오름의 정상에 오르자, 시원한 3월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막 다투고 뛰어나와 속에 가득 차 있던 신열이 차가운 바람에 듬뿍 덜어졌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들자, 풍경을 뒤로 하고 서둘러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차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디예요?
"산책 조금 했어요, 이제 들어갈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안도하는 한숨이 들렸다. 방금 전까지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답지 않은 떨림이 새어나와 차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숙소로 사용 중인 최수현의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차현을 맞이한건 가운 차림의 신제윤이었다. 그것도 슬리퍼를 신은. 차현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걸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진짜 걱정하긴 했구나.
"어디 다녀왔어요?"
문을 열고 내리자 마자 그녀는 제윤의 품에 끌어안겼다. 정확히는, 갇혔다고 표현하는게 옳았다. 두려움과 흥분으로 달아오른 체온이 차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차현은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거문오름이요,'라고 짧게 대답한 뒤 그를 실내로 데리고 들어갔다. 건조한 바람 탓에 목이 말랐다.
커피를 두 잔 내려 거실로 가지고 들어가자, 벽난로 앞에 신제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중증이긴 한가보다, 콩깍지가.' 차현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그에게 하얀 머그잔을 건네주었다. 그는 커피를 받고도 마시지 않은 채, 한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갑자기 뛰쳐나가서 걱정했어요? 서울로 가버릴가봐?"
"......"
"저도 뭐,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긴 했어요. 싸운다고 뒤돌아서 도망가는건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사실 몇 시간 전--처음으로 둘 다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었다. 제윤은 차현이 휴가 중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길 원하는걸 이해하지 못했고, 차현은 제윤이 계속해서 자신을 품 안에 가두는 걸 못견뎌 했다.
제윤이 별로 가고싶지 않아 하던 오름에 오늘 아침 홧김에 다녀온 것도 그 반발작용 중 하나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품에 하루종일 안겨 있느라 관광은 제대로 못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막상 다녀오고 나니, 그를 설득해서라도 함께 다녀올걸--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차현은 제윤의 옆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다가, 머그잔 덕분에 따뜻해진 손을 뻗어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그도 피하지 않고 손가락을 얽었다.
"...걱정했어요. 화나서 운전하면 가끔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하니까, 사고 날까봐."
"그런데 먼저 전화는 안하구요?" 차현이 옆에서 하르르 웃자, 긴장이 풀린 제윤이 그제야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면서요." 살짝 삐진 듯한 말투. 사실 제윤은 자신이 말을 마치자 마자 차현이 휙 돌아서 나가버린 일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누구도 그에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한 적이 없던데다, 차현이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끌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그녀가 먼저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차인 줄 알았을거다.
하지만 차현은 그에게 돌아왔다.
"미안해요, 화 내고 나가버려서. 놀랐어요?"
"약간...하지만 내 탓도 커요. 소리를 지르는게 아니었는데."
"그게 소리지르는거면 세상 사람들 다 성악을 할걸요," 차현이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쿡쿡 웃었다. "그치만 우리, 처음 만난게 7년 전이잖아요. 7년이면 그 때의 권차현을 구성하던 세포가 여태껏 몇 번은 바뀌었을걸요?"
머그잔을 내려놓은 제윤이 차현을 품에 다시 끌어안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잡은 채 가슴팍에 등을 완전히 기댄 차현은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렇죠...그치만 화가 났어요. 나는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더 붙어있고 싶거든요. 그런데 차현 씨는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아까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녀가 일부러 그의 손등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사실 두시간쯤 전의 심리 상태였다면 그가 이렇게 말해도 이미 흥분한 상태라 자신도 소리를 질렀겠지만, 찬 기운을 쐬고 온 덕분인지 장난기가 돌아와 있었다. "여행지엔 우리 둘 뿐이니까 서로한테 더 집중해야 했는데, 내가 고집이 과했어요. 미안해요."
"아니......" 그가 차현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바깥에서 함께 들어온 풀내음이 났다. 제윤에게는 그녀가 돌아온 걸로 충분했다. "나도 미안해요. 다시는 소리지르지 않을게요. 차현 씨가 원하면 혼자 있어도....."
"나랑 같이 있는게 좋아요?" 차현의 물음에 제윤이 그녀를 일부러 세게 안았다. 대답 대신 그녀의 목에 입술로 진한 자국을 남겼다. 품에 안긴 그녀가 작게 신음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마당에 있는 모닥불은 차현의 작품이었다. 제윤은 모닥불 옆에 캠핑의자를 두 개 놓으며, 차현을 흘끗 쳐다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채 불 안에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는 모습은 가히 프로다웠다.
그런데, 그 직업이 예술작품을 다루는 큐레이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묘하기도 했다. 차현과 저녁 내내 함께 있던 적은 많았지만, 며칠간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시간을 보낸건 이번이 처음이라 서로에게 놀랄 만한 일들이 많았다. 이제 내일이면 두 사람 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전까지 그녀를 잔뜩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정작 돌이켜 보면, 역으로 자신이 차현에게 물들고 말았다.
7년 만에 재회한 그녀는 세월이 흐르며 그의 상상에서 덧붙여진 청순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생활력이 강하고 의외로 터프한 구석도 있었다. 모닥불은 차현의 본모습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차현 씨, 이제 앉아도 될 것 같아요." 제윤이 어깨 위에 담요를 두른 채, 차현의 손목을 살짝 잡아 끌고는 따뜻한 코코아가 든 잔을 건네주었다. "굉장하네요, 난 이런거 잘 못하는데."
애인이 토치를 들고 장작과 숯을 능숙하게 달구는 모습을 보게 될거라곤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손을 뻗어 차현의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아주었다. 불가에 있어서 그런지 코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사실 처음 해봐요!" 차현이 순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티비에서 보던거 그냥 흉내만 내봤는데, 금방 되네요."
제윤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이라고?
"숯이 잘 말라있어서 그랬나...산불 안 냈으면 된거죠, 뭐. 오로라 가루도 넣어볼까요?" 그녀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봉지를 하나 꺼냈다. 안에 든 가루를 모닥불 안에 털어넣자, 붉은색으로 타오르던 불이 오로라의 색으로 바뀌었다. 제윤은 황홀한 만큼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바라보다, 차현을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이 사람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측 불가능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미술관에서 능숙하고 우아하게 그림들 사이를 오가며 일하던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상적인 면을 자신이 독차지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차현 씨," 제윤은 차현이 손에 들고 있던 잔에서 코코아를 빼앗아 마시곤 그대로 입술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조만간 우리 집에 인사하러 오지 않을래요?"
코코아 향이 감도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차현은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몇 초나 걸렸다. 우리, 집, 인사.
그 말은, 제윤의 집에 정식으로 방문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그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 그녀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만나는 것에 홀려 한 켠에 밀어두고 방치하던 사실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 실망하겠지.
"부담스러우면..." 차현의 얼굴에 걱정이 떠오른 것을 알아 챈 제윤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좋아요."
"별로 절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저, 부모님이 안계시거든요. 어릴 때 절 고아원에 버려두고 이혼했어요."
그것도 두 사람 다 각자 인생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세상에 그 둘로 인해 태어난 아이를 버려두고 제 삶을 찾아 떠났다. 차현이 두 사람의 사망소식을 들은 시기는 달랐지만, 그 소식을 전해준 이들은 그녀에게 받아낼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꿈을 쫓느라 진 빚을, 꿈 대신 버린 아이가 갚아야 했다.
"그게 차현 씨를 사랑하는데 문제가 되진 않는데요?" 그런데, 실망할 줄 알았던 제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지난 7년간 누구도 만난 적이 없거든. 그래서 우리 집안에선 내가 게이인 줄 알걸요?"
"7년동안...아무도 안만났어요?" 차현의 미지근한 반응에 이번엔 제윤이 금방 그 속에 든 저의를 알아챘다. "아야!"
그가 차현의 뺨을 꼬집은 것이다.
"차현 씨는 매력적이니까 누가 대시해도 이상할게 없지만...조금 화나네, 그거." 자신이 7년 전의 권차현을 그리워하며 찾는 동안, 그녀의 빛을 누군가 감춰두고 있었던거다. 그래서 다시 찾아내는데 7년이나 걸린것이다.
"헤어진지 꽤 됐어요. 그것도...바람 피우는거 그 쪽에서 들켜서."
"누군데?" 그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감히 누가, 그녀를 두고 양다리를 걸치는 것도 모자라 상처를 줬단 말인가. 하지만 차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은 인연도 아니었다. 지금은 신제윤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7년의 시간을 건너, 그녀를 기다려 준 사람. 스쳐 지나간 그 때의 만남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차현을 먼저 알아봐 준 남자.
제윤의 이마 위에 차현의 입술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눈꺼풀 위에, 코 끝에, 양 뺨에, 마지막으로 입술에.
"이번 여행이 끝나면 집에 같이 가요." 차현의 눈동자를 올려다 보며,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차현이 과거에 누구와 만났건, 지금은 그의 사람이었다. 그 사실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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