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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B1 본문
3월의 델프트는 마치 시간이 멈춰진 듯 했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벽돌집들은 17세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창문마다 새하얀 레이스 커튼이 나풀거리고, 화분에 심은 제라늄이 붉은 꽃을 피웠다. 붉은 꽃잎을 스치는 바람은 청량한 향기를 머금고 거리를 맴돌았다.
권차현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 창문 사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오후의 빛을 담았다.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보았던 빛, 그의 특별한 눈을 통해 캔버스 위로 옮겨진 독특한 색감 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곳에 서서 똑같은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는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덜란드에 온 이후 매년 3월이면 이 도시를 찾았지만, 이곳의 빛만큼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셔터를 누르고,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자-
낯선 골목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만족감이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려 밀려났다.
'여긴 어디지...?'
종종 겪는 일이라, 지도 앱을 켰다. 골목 하나하나에 홀려 걸음을 옮기다 이 작은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녀에게 벌어졌다. GPS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벽돌 건물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차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포기하듯 벽에 등을 기대고 반쯤 주저앉았다. 머리를 쓸어 올리려던 찰나, 거칠어진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매번 약품을 이용해 미술품 복원 실습을 하다 보면 손이 거칠어지는 일은 예사였고, 다들 '그렇게 큐레이터가 되는거야,'라고 다독여 주었지만 역시 신경이 쓰였다.
주머니에서 따끈해진 핸드크림을 꺼내 손등에 펴 발랐다. 은은한 랍스베리 향이 공기 중에 퍼지자, 가장 익숙한 공간에 머문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길 찾으세요?"
이상하게도, 한국인들은 해외에선 자국민들을 기가막히게 알아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차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하마터면 기립성 저혈압 때문에 넘어질뻔 했다.
신제윤은 델프트의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방문해야 할 장소는 이제 한 곳 남아있었고, 여유있게 움직인 덕분에 시간을 좀 더 할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 덕분에 무리지어 다니는 관광객과 좁은 인도에서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일부러 3월에 델프트를 방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인수 대상자와의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다음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각국의 호텔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델프트는 호텔의 컨셉을 정하기 위해 꼭 방문해야 할 도시였다.
"...한국인인가?"
그때, 바람을 타고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랍스베리. 길을 걷다, 한국인을 만나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향은-묘하게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골목 안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한숨을 쉬는 얼굴은 왠지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결코 먼저 다가서지 않았겠지만, 그는 어느샌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혹시...길 찾으세요?"
벼락처럼 들린 한국말에 그녀가 일어나려다 휘청였다. 그녀는 하르르 웃더니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지도를 보는데도...어딘지 모르겠네요."
차현이 내민 휴대전화 속 지도 어플을 보니, 정말 그대로 길을 잃을 법한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큰 길까지만 데려다 주시겠어요?" 제윤도 마침 그렇게 하려던 차라, 차현의 제안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쯤 되었을까? 혼자 다니는걸 보니 이미 성인인 것 같았는데 아직 앳된 티가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옅게 풍기는, 달콤한 랍스베리 향. 향수는 분명 아니었다.
제윤은 뜻밖의 동행인이 생긴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하긴 했지만 타국에서 말이 통하는 한국사람을 만나는 일은 자주 겪을 수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2년째 머무는 중이고,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재잘댔다.
"델프트에 왔다는건...역시 요하네스 베르메르 때문인가요?" 제윤이 묻자 차현의 눈이 반짝였다. 정답!이란 표정이었다.
"베르메르의 눈은 정말 특별하거든요. 작년에 여기 올 때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빌려서 직접...같은 장소에서 풍경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말 많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차현이 하는 이야기들은 꽤나 흥미로웠다. 그녀는 베르메르에서 부터 시작해 17세기 네덜란드의 화풍, 심지어 베르메르의 영향을 받은 다른 시대, 다른 국가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쉴새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무겁다거나 짜증나지 않았다.
큰 길가로 접어들자, 신제윤은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기왕 이렇게 된거, 미술관에 같이 가자고 해볼까?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골목을 빠져나왔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카페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시간은 한시간이나 이어졌다. 제윤은 차현에게 자신을 '경영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만 해 두었다. 차현을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다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종종 제윤의 껍데기만을 보고 달려드는 이들을 몇 번 겪은 뒤 생긴 습관같은 것이었다.
"그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네덜란드 왕립 미술관은 가 보셨을 것 같고...아! 여기 델프트 시립 미술관에도 멋진 작품들이 많아요."
"안그래도 오늘은 거기 가려던 참이었어요." 깜빡했다. 분명 자신은 미술관으로 가는 중이었다. 제윤은 뒤늦게 목적을 떠올리고 낭패감이 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 하지만 우연히 골목에서 만난 여자가 그의 발걸음을 시내로 돌리게 했고, 한시간이나 그를 붙잡아 놓았다.
"그럼 같이 가실래요?"
그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차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갈 채비를 했다. 제윤은 그때, 그녀가 손등에 바른 핸드크림에서 선명한 랍스베리 향기를 맡았다. 향수가 아니라, 핸드크림이었구나.
차현은 미술관에 들어서자 마자 익숙한 향을 폐부 깊숙히 받아들였다. 며칠째 혼자 오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동행이 있었다. 몇 번이나 마주쳐 이제 얼굴이 익숙해진 경비원과 친밀한 눈인사를 나눈 뒤, 제윤을 이끌고 간 곳은 베르메르 전시관이었다. 미술관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고, 이 낯선 남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그림들이 여기 있었다.
"델프트 풍경-."
제윤의 입에서 나지막히 작품의 제목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이나 경탄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현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저런 표정을 보일 때가 가장 행복했다. 자신이 좋아하는걸 남이 좋아해주는 기분, 그리고 같은 그림을 보고서도 그림의 매력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고.
"이 그림에서 빛이 물에 반사되는 방식이...아마도 카메라 옵스큐라로 본 걸 베르메르만의 방식으로 옮겼을거라고 해요."
"...정말 아름답네요." 유려한 묘사보다는 때론 이런 단순하고 솔직한 평가가 좋았다. 차현은 그의 옆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메르가 이 그림을 그렸던 시대와 우리가 지금 여길 보는 빛은 완전히 같진 않겠지만...그래서 이 그림이 매력적이예요. 우리에게 닿고, 우리가 보는 모든 빛은 조금도 같았던 적이 없거든요."
"시적인 표현이네요. 그렇지만...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시간도, 빛도, 한번도 머무른 적이 없는데-."
"그림 속에는 그 순간이 온전히 남아있죠."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은 듯, 차현과 제윤의 시선이 그림 앞에서 얽혀들어갔다. 옅은 웃음이 두 사람의 얼굴 위에 피어났다.
그리고 둘 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 시간이, 서로의 평생에 각인처럼 남아있게 될 것임을.
미술관에서 나온 차현과 제윤은 로비에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윤은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려다 멈추었다.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은 하고싶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이니 여행지에서 깔끔하게 헤어지는게 맞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제윤은 차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저는 곧 기차가 떠날 시간이라,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차현이 그의 손을 잡았다. 환한 미소와는 다르게 얼음처럼 차갑고 여린 손이 그의 손아귀에 쏙 들어왔다.
"저도요. 하마터면 골목에서 헤매다 오늘 하루를 날릴 뻔 했는데, 미술관까지 같이 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서로 할 말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 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이내 굳게 닫혔다.
어차피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 차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면 그걸로 충분한 인연이겠지.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라요."
"...네."
어색한 침묵을 가르고, 제윤이 차현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의 양 팔이 차현의 어깨를 감쌌다. 엉성하지만 따스한 포옹이었다.
짧았다. 3초, 아니 4초쯤?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차현은 제윤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그녀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품에 끌어안기면서 그의 향기가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샌달우드. 따뜻하고 깊은 나무향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향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학생활 힘내시고...건강하게 지내요."
그가 그녀를 놓아주고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차현은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어깨를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감쌌다.
대부분의 만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만남은 사람의 인생에 각인처럼 새겨져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미술관 로비에서 헤어진 뒤 숙소로 돌아가던 차현은, 그 남자에게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렸다.
타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는 일이 흔한 것도 아닌데 물어볼 걸 그랬다.
'후회 해봐야.....'
뒤돌아 섰지만 이미 제윤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그도 한순간의 즐거운 추억으로 묻어둔 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터였다. 그 쪽에서 미련이 없다면 자신도 그래야 균형이 맞는데...자꾸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럼 오늘 오후를 액자처럼 마음 속에 걸어둔다면, 액자 밑에 달아 둘 제목이라도 적을 수 있었을텐데.
아까 품에 짧게 안겼을 때, 샌달우드 향이 났다. 크리스티안에게 물어보면 이 사람이 쓰는 향수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기억하고 싶을 때 그 향수를 쓰면 되지 않을까?
차현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샌달우드, 아이리스, 라임. 그리고 바로 크리스티안에게 향수를 찾아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의아해하긴 했지만, 곧장 차현의 기억을 되살려 줄 몇 개의 향수 목록을 보내 주었다.
"또...만날 일이 있을까?"
세상은 넓고, 심지어 해외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몇 년만 지나면 목소리도, 얼굴도, 나중엔 만났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름을 묻지 않은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 수도 있겠지.
후회...차현은 뒤늦게 그가 향하던 기차역으로 뛰어갔다. 약간의 행운만 따른다면, 어쩌면-그를 만나서 이름 정도는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델프트 기차역 플랫폼.
차현이 숨을 헐떡이며 막 도착했을 때, 기차는 막 떠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여행의 기대감 혹은 이미 끝난 여정의 피로감을 가득 담은 얼굴들이 비쳤다. 그녀는 빠르게 플랫폼에 남은 사람들, 기차 안에 자리잡은 여행객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신제윤은 없었다. 어쩌면 반대편에 앉았을지도, 간발의 차로 5분 전에 떠나버린 기차에 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떠난 기차 안에서 그도 이 플랫폼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차현이 여기 나타나주길 바라고?
차현은 기차가 떠난 플랫폼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손 안의 핸드폰에는 크리스티안의 두 번째 문자가 도달해 있었지만, 그녀는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아쉬움을 애써 감추려 했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그랬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 일이 드문 일도 아닌데, 이것도 기념이라며 뻔뻔하게 셀카라도 같이 찍어둘걸.
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고 그녀에게 남은건, 흩어진 향기를 끌어모아 크리스티안에게 얻어낸 향수 리스트 뿐이었다.
♪Music with. Beautiful Things, Benson B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