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Di 245(BE, AE)

단편 추가!

alicekim245 2025. 5. 28. 22:01

6.1.
신제윤은 아무렇지 않게, 퇴근하려던 차현을 전화 한 통으로 붙잡았다.
“오늘 저녁, 비워두도록.”
어제 겪은 일은 솔직히 사고였다. 본부장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순간이동을 하긴 했는데, 그게 하필 그 남자 무릎 위일 줄은 나도 몰랐지. 그러고 나선 어쩐지 키스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선을 넘기 직전 신서율이 나타나는 바람에 거기까진 가지 않았다.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으니까, 이건 사고도 뭣도 아니잖아?
그래서 그녀는 얼굴에 철가면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솔직히 쉬웠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굴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어제 저녁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던 그와의 간격이 자꾸만 떠올라 업무에 집중하기가 아주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갑자기 다짜고짜 자길 붙잡더니 이른바 ‘추가근무’ 지시를 한 것이다.
차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일까지 정리해야 할 문서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분명 끝내지 못한 일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집무실에서 나온 신제윤이 그대로 비서실로 들어와 차현을 아주 익숙하게, 1층 로비로 데리고 갔다.
‘이대로 그냥 퇴근할거면, 저녁은 왜 비워두라고 하는거야?’ 그녀가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것이 마치 들리기라도 한 듯, 신제윤이 자기 차의 조수석을 무려 ‘손수’ 열어주었다.
차에 타라는 행동, 그리고 무언의 초대였다.
“설마 야간 출장은 아니죠? 수당 챙겨주셔야 해요.”
차는 이미 부드럽게 건물을 빠져나왔지만, 그 너스레에도 신제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대로 납치당하는거 아니야? 차현은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도, ‘그러면 순간이동으로 튀면 되겠군.’ 그리 생각했다. 어제 갑자기 순간이동 마법을–정말로 얼떨결에 배운 것을 바로 써먹을 기회가 오길 아주 약간 바라게 되었다.
“도착했군. 올라가지.”
“정말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요?” 그를 뒤따라 가면서 한소리 했다. 대체 어딜 데려가는지 알려 줘야, 대비를 할 것이 아닌가. 만약 업무 관련 미팅이 저녁에 잡힌거라면, 비서인 자신에게 일정은 물론 의제나 참석자 정보까지 넘어왔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막무가내인 것일까.
신제윤은 승강기에 올라탄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눈은 바라보지 않은 채, 그저 차현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만 확인했다.
“신제윤 님, 예약하신 방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차현은 지금 자기가 어디 와 있는지, 그 리셉션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니까, 비서랑, 저녁에.
그녀는 이미 체념한지 오래였다. 업무 회의로구나. 급하게 잡힌. 그러니까 자길 이렇게 데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무 회의면 제발 사전에 말씀을 해주세요.” 제윤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차현은 으레 그 내실 안에 회의 참석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신제윤이 익숙하다는 듯 외투를 직원에게 맡기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내실 안에는 이미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고, 의자는 단 두 개 뿐이었다.
“어?”
당황한 차현의 반응을 물끄러미 보던 제윤은, 손을 뻗어 그녀에게 앉으란 표시를 했다. 그리곤 왼손으로 턱을 괸 우아한 자세로, 얼음이 된 듯한 차현을 향해 말했다.
“업무 회의를 할거라면 사전에 네게 말했겠지.”
“그럼 이건?”
“어제……크흠, 그러니까 어제 일에 대한 사과다.”
“사과요?”
“가만 안둔다더니?” 이번엔 제윤의 반격에 차현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는 할 말을 고르지 못한 채, 직원이 따라준 레드와인을 한 모금 먼저 마셨다.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그 직후의 상황이 더 문제였지만.
“신서율 과장이 그러더군.” 신제윤의 표정은, 어제 그녀가 그 직후 느꼈던 당혹감은 전혀 고민하지 않은 듯 평온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사과하는게 옳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사과할 방법은 이것밖에 떠오르질 않아서.”
“그래서 아무 설명도 안하고, 이런데를 데려왔다구요?” 차현은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런데는 데이트로 오면 좋겠네요,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가 아니라.”
“그거……무슨 의미로 말하는건가?”
“사과해 주시는거야, 사양 않고 받아들이죠. 덕분에 순간이동 마법을 배운건 사실이니까.” 그녀가 와인을 다시 한 모금, 입 안에 잠깐 머금고는 삼킨 뒤 말했다. “그런데 방식이 꼭 좋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오해를 사기 쉽거든요, 저는 이미 뭐, 본부장님 취향 아니니까 상관 없지만.”
“취향…이라.” 제윤도 차현을 따라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 그런 이야기를 처음에 하긴 했지.”
“저야 비서니까, 이해해 드릴 수 있어요. 그치만 나중에 정말 소중한 분이 생기면, 이렇게는 하시면 안돼요. 그 분한테 상처가 될거예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차현의 솔직한 말에, 제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채가 나오고 나서야 그가 겨우 한마디 했다. 어쩐지 아까보다는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제 일은 쌍방 과실이었던걸로 치죠. 본부장님도 과했고, 저도 과했으니까.”
“......”
“오늘은 그동안 본부장님 비서로 일하면서 고생했으니까, 대접해 주시는 걸로 칠게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저녁식사는 처음이었다. 와인이 들어가면서 알코올 덕분에 긴장이 약간 풀어지긴 했지만, 차현은 상사 앞에서 마음을 전부 다 드러내보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 직장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고, 제윤과 일하는게 썩 나쁜 경험만은 아니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잘 맞는 상사였다.
여전히 신제윤은 그녀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이상적인 외모의 남자이긴 했지만, 이미 초반에 거절부터 당하고 시작한 관계가 아니던가. 그냥 옆에서 서포트 해주면서 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그걸 이런 로맨틱한 장소에서 내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일은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의미인가.”
“이런데 와 보는거,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거든요. 본부장님이랑 같이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사람, 아까부터 말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 메뉴인 디저트만 기다리고 있는데도, 차현이 식사 중 제윤과 몇마디 겨우 나눈 대화는 업무 이야기가 전부였다. 어두운 조명 탓에 제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점점 안좋아 진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몇 달 일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의 기분을 잘 파악해야 하는 비서였으니까.
“본부장님.” 그렇지만 이런 좋은 곳에 와서, 기분나쁜 채로 마무리하도록 두고싶지는 않았다. 내일 업무에 영향이 갈 수도 있지 않나? 차현은 그리 생각하며, 제윤을 향해 잔을 들었다. 건배하자는 의미였다.
제윤이 한숨을 옅게 내쉰 뒤, 그녀의 장난스런 건배를 테이블 맞은편에서 받아주었다.
“권차현 주무관, 눈치 없단 소리 가끔 듣지 않나?”
“제가요? 제가 눈치없으면 본부장님 비서 노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현이 하르르 웃었다. 정말 말 그대로, 차현이 이 사람 눈치를 제대로 볼 줄 몰랐다면 몇 달이나 같이 일하기는 커녕 며칠만에 신서율이 버티고 서 있는 마법처리과로 도망을 갔을거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딱 마지막 한 모금이었는데, 그게 결정타가 되었는지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디저트를 먹은 뒤에는 자연스럽게 신제윤의 부축을 받아 차로 돌아왔다. 차현은 조수석에 앉은 내내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느낌이었다. 한 잔씩 마셔서 괜찮다고 과신했는데, 알코올이 오랜만에 혈관에 들어가서 그런가, 마지막 잔에 확 취해버릴 줄은 몰랐다.
“본부장님,”
술냄새가 차 안에 나서 불쾌할법 한데도, 신제윤은 곧은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채 부드럽게 가속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차현은 저 평온한 얼굴에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술 취하면 이런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구나.
그녀의 부름에 신제윤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조수석 쪽으로 돌렸다.
“농담으로라도, 이럴 때 갑자기 저 좋아한다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진짜 무너질 것 같으니까. 나는 이 사람 비서니까. 취향이긴 하지만 한 번 차였으니 그걸로 끝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던 것들이 한번에 날아가버리면 정말 못 견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신제윤이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농담으로 하면, 받아줄건가?”
농담이 아닌 것만 같아서, 차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 취한 사람한테 하는 고백은 무효예요.”
“그런가. 그럼 다음으로 미루지.”
어쩐지 그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가득 찬 것 같아서, 차현이 바보처럼 배시시 웃었다.
정말 이 사람이랑 사귀면 어떨까? 비서로 일하면서 그런 상상을 조금 해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만두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니 이제와서, 갑자기 그가 고백한다면 ‘장난치는거구나’ 라는 가정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차현은 눈에 띄는 미인도 아니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성격이 유순한 것도 아니니 신제윤의 취향은 아닐게 당연했다.
게다가, 초면에 경박하게 ‘사귈래요?’란 소리까지 한 사람이니까. 신제윤은 그저 차현이 이제 편해져서,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편한 사이에선, 사귀네 마네 그런 농담도 마구 건네던데, 영화나 드라마 보면.
차현은 의식이 점차 흐릿해져갔다. 이건 마법으로 공격당하거나, 피곤에 지쳐서가 아니라 오로지 알코올의 영향이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신제윤이 ‘언제쯤 받아들일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를 침대 속에 넣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쓰다듬는가 싶더니 코끝에 가볍게 키스한 누군가의 입술에, 옅은 와인향이 감돌았다는 것 뿐이었다.

6.2.
차현은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은 싫어했지만, 지금 이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보호 하에 쉬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신제윤은 그녀의 코끝에 가볍게 키스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후우–.”
그러나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분명 사과하려고 겨우 만든 자리인데, 업무 회의냐며 착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아달라’니. 아마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면, 그렇게 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사실 술 취한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해봤자, 차현의 오늘 행동패턴을 봤을 때 ‘그냥 실수였죠? 그런 걸로 하죠.’라고 말하고 유야무야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음은 정했는데, 전달하는 방식을 바꿔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신제윤은 아주 오래 전 파혼한 이후, 누구에게도 자기 마음을 전달할 필요도 이유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본디 모르기 보다는, 잃어버린 쪽이 되찾기 어려운 법이었다.
좋아한다고 속으로 인정은 했는데,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비서니까’, ‘비서라서’라는 핑계를 대며 도망갈 사람이었다. 그냥 방법으로는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도, 남길 수도 없었다.
우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관계였다.
그걸 바로잡는 일이 어쩌면 한참 걸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십수년 만에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문득 깨닫게 해 준 이 사람이, 이 사랑이 소중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허투루 내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잠든 차현의 머리칼을 다시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제 고른 숨소리를 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잠결에 들으면, 들었더라도 금방 잊을테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오래 기다리진 않을거다.”
그녀를 한 번 더 돌아보던 제윤은, 조용히 등을 돌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밤이 다시 방 안을 채웠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