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A시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7
처음부터 피아노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내내 피아노는 내 방과 후 활동이었고, 강제된 일이었기에 좋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강요하거나 요청해서 하는 것보다는, 내 스스로 찾아서 하는 일들이 아무래도 더 즐거웠으므로. 그렇기에 피아노를 좋아하게 된 건, 누구도 내게 피아노를 치라고 강요하지 않던 시점부터였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은 퇴근 후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테크닉을 배우고, 새로운 곡들을 치면서 피아노는 서른 이후 나의 확고한 취미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퍽이나 다행이었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내 남은 저녁시간은 대체 무엇으로 채워나갔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심지어 그토록 하고싶어 하던 게임을 할 시간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이따금 닌텐도 스위치를 거치독에서 꺼내 동물의 숲을 플레이할 뿐이지만, 전적으로 게임에 매달리는 시간은 이미 지나간 듯 했다. 아마 새로운 게임 중 나를 사로잡는 명작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장 최근에는 동물의 숲이었고, 그 이전에는 파이어엠블렘-풍화설월이었다. 훨씬 이전에는 심즈, 크루세이더 킹즈, 온갖 온라인 게임들(던전앤파이터,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그라나도 에스파다 등등)이 내 여가생활을 채워주었다면 지금은 어째서인지 타인이 보기에 바람직한(?) 취미생활을 영위하는 셈이었다.
그런다고 게임을 아예 접은 것도 아니지만 지금 취미생활의 비중을 보면 절반 이상이 피아노, 그 다음이 독서, 마지막이 게임 아니면 드라이브 정도일 터다.
건반 위에 올린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같은 구간에서 여지없이 실수를 반복할 때 적잖이 짜증이 나지만 연습 또 연습. 거듭하다 보면 어느샌가 익숙하게 그 마디를 넘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외우다시피 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는 이제 치다가 다른 생각만 안 한다면야 전부 다 칠 수 있을 정도로 다듬었는데, 자꾸 뭔가 떠올라서 문제다. 향기나, 노래에 기억을 연결시키는 습관 때문에서인지--그 곡을 격렬하게 연습할 때의 일들이 엮여버려서 상당히 곤란하다. 꽤 그럴듯하게 한 곡을 다 연주한 경우는, 칠 때 정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았을 때다.
글을 다시 쓰려고 이것저것 종이에 끄적이고 있는데 막혔던 진도가 풀리는 순간은 늘 밤이다.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적막에 혼자 들어앉아 있으면 등장인물들이 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신기한 일이지, 그 사람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데. 사랑하던 사람을 보내고 나면, 가장 처음으로 잃는 것이 목소리라고들 해. 눈에 담은 모습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다고.'
한 가지에 중독된 듯 몰두하다가, 또 언젠가는 시들해지는 날이 올거다. 나의 휴식 시간들은 언제나 그러기를 반복해 왔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거고, 과거에 했던 일들을 다시 하면 했지 새로운 것들이 침투할 기회는 점차로 적어질 터다. 나이가 듦은, 더이상 변화를 기꺼워하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인데--그걸 애써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요즈음 체감하고 있다. 한 번 정해진 것을 바꾸는 것을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과거에 했던 수많은 행동들(동작이나, 말이나, 생각들까지도)은 다른 이들의 평온을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을까. 뒤흔들어 놓기는 했던걸까?